탈북 10代 청소년들의 ‘특별한 그림 수업’ 자유로운 몸짓… 자유로운 색깔
 
2006. 1. 7 조선일보 / 김윤덕 기자 sion.chosun.com
   
 
▲하얀 도화지 가득 색색의 물감으로 자신의 마음을 펼쳐놓은 탈북자 가족 아이들. 빨간 물감으로 커다랗게 창문을 그린 한 여학생은 "넓고 넓은 바깥세상을 원없이 바라보고 싶어서..."라며 수줍게 웃었다.
  6일 낮 12시, 서울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에서 특별한 수업이 열렸다.

바닥과 벽이 온통 하얀 도화지로 도배된 강의실에 엉거주춤 서 있는 20여명의 탈북자 가족 아이들. 미술 강사 이지은씨가 “지금부터 이곳을 다 그림으로 채울 거예요”라고 하자,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윤미(가명·13)가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다 그려요? 그림 잘 못 그리는데….” 이씨가 손을 젓는다. “못 그려도 돼요. 물감이랑 신나게 놀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림이 나와요. 두고 보세요.” 6~7일 이틀에 걸쳐 탈북한 10대 청소년들을 위해 그림 수업을 마련한 사람은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학생들과 미술교육집단 ‘인투뮤지엄’ 강사들. 9월부터 탈북자 가족들을 면담하는 동안 아이들이 미술 공부에 가장 큰 어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구원생들은 인투뮤지엄의 젊은 강사들과 함께 ‘미술 놀이’ 시간을 마련하게 됐다.

“놀랍게도 새터민(탈북자) 아이들은 색깔은 12가지밖에 없다고 믿고 있어요. 초등, 중학 할 것 없이 12가지 색 물감을 다 갖고 있는 아이들도 없답니다. 남한에 와서 아이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물건이 24색 포스터 컬러지요. 색깔을 다양하게 경험한 적이 없어서인지 아이들은 밑그림은 잘 그려도 색칠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이해정 연구원)

사상교육의 한 방편으로 미술 수업을 했던 아이들에게 이날 수업은 놀이 그 자체였다. 물감 묻힌 탁구공을 굴리고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추상화’ 한 장을 멋지게 완성한 아이들은, 색색의 매직펜과 분무기로 ‘나의 여름 이야기’를 벽과 바닥에 손 가는 대로 그려갔다.

처음엔 뒤로 숨기만 하던 정화(가명·15)는 어느새 파도 위에 간당거리는 돛단배를 그렸고, 현주(가명·11)는 분홍색, 보라색 네잎클로버를 지천으로 그려놨다.

이제 열 살인 준형(가명)이는 바닥 한쪽 모서리에 연두색 물감으로 한자를 썼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아이는 “지긋지긋하게 더운 여름이 가면 선선한 가을이 오잖아요” 하며 수줍게 대답했지만, 이해정씨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준형이 엄마가 얼마 전 ‘국경을 세 번 건넌 여자’라는 책을 써 화제가 됐던 탈북시인 최진희씨예요. 당시 세 살이었던 준형이를 데려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세 번이나 건너야 했죠. 아주 어릴 적이지만, 엄마 등에 업혀 강을 건너던 기억이 무의식중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누군가 선생님에게 묻는다. “앉아서 그려도 돼요?” 기다렸다는 듯 “누워서 그려도 돼” 하는 답이 나오자 ‘와르르’ 폭소가 터진 교실. 이제 아이들은 겁이 없다. “그쪽(북한)에선 탱크를 그리지 않으면 총을 만들었어요” 하고 속삭이듯 말하던 기혁(가명·12)이는 “내 마음대로 찍고 뿌리고 뭉개도 이렇게 멋진 그림이 되는 줄 몰랐어요. 참 재미있어요” 하며 활짝 웃었다.

“나를 찾아 드러내고, 상대와 소통하게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하는 최윤아 인투뮤지엄 대표는, “문화적 소외감으로 겉돌 수밖에 없는 이 아이들에게 내재된 예술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